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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밖에 없는 정신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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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짧은 단편] 추석에 찾아온 청춘.



"에구구 우리 아들, 얼굴 보는 게 벌써 얼마만이야."

"쨔사, 꽤 예뼈졌다 너?"

"진짜? 사촌오빠 그 말 거짓말 아니지?"

"미안해."


추석.

추석이라고 하면 가족들의 만남. 평소에는 이름조차 몰랐던 사람들이 별다른 이유 없이 모임을 가지는 날이 바로 추석이다.


그리고 그런 추석날, 광수네 집은 같은 동네의 정숙이네 집과 함께 추석을 보낸다. 쓸데 없는 정보를 왜 굳이 알려주냐고 불만할 수도 있겠지만, 계속 들어보시라.


광수는 결심을 한 것이다.

이번 추석날이야 말로 정숙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겠다고. 광수는 보기와 다르게 부끄럼을 많이 타는 shy한 남자였기에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말을 걸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만날 계기를 제공해주는 이번 추석은 굉장히, 아주 굉장히! 중요했다.


"아, 할아버지 어서 오세요."

"어어, 우리 막내도 많이 컸네."

"이제 중3이었던가? 고1이야?"

집안은 시끌벅적했지만 광수는 그런 세속적인 대화에 귀를 귀울일 여유따위 없었다. 그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은 오로지 순정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뜨거운 사랑. 그것 뿐이었으니까.


"!"

그리고 정숙이가 모습을 나타났다. 광수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동요하면서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름다운 얼굴. 우아한 태도. 흠 잡을 곳 없는 세련된 복장.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신성한 자태.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적어도 광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광수가 그녀에게 반한 것은 1년 전의 추석이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었지만, 별 것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이내 그녀의 섬세한 감성과 배려가 넘치는 성품에 반하게 된 것이다.


이미 나이를 좀 먹어 젊다고는 하기 힘든 광수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여성은 없었다. 여자라고 하면 보통, 존대말은 쓰긴 해도 마음속에서 직업도 없고 집의 밥을 축내고만 있는 자신을 비웃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정숙이라는 여성은 자기보다 8살이나 어리면서도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 광수는 푹 빠져버렸다.

그래서 오늘 결심한 것이다. 이 뜨거운 마음을 전하겠다고.


잠시 후, 광수네 집의 큰 안방.

거기서 광수는 그녀를 기다렸다. 할 말이 있으니 큰 안방으로 와달라는 말은 이미 해뒀으니 이제는 기다릴 뿐이었다. 아마 그녀도 광수가 호출한 이유를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저기,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건가요?"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온 정숙이가 말했다. 광수의 얼굴은 당장 응급실에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아니, 그, 에, 으음......"

입술과 혀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의 혀를 살짝살짝 간지럽히고 있는 것만 같다고 광수는 생각했다.


"저기요......?"

바로 그때, 광수 인생에 지금까지 없었던 용기가 그의 혀에 내려왔다.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광수는 소리쳤다.


"사랑합니다 정숙씨! 결혼해주세요!"

"......"

찾아오는 것은 끝없는 침묵과 기묘한 분위기. 광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부터 나올 결과를 보기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의 눈이 떠진 것은, 한참 후에야 정숙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줄곧, 저를 그렇게 생각하시고 계셨던 거에요?"

눈을 뜨자, 그곳에는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정숙이가 있었다. 이것은 , 이것은 혹시? 하고 광수는 내심 생각했지만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애썼지만 무리였다.


"그게, 으, 그렇다만..."

정신과 의사가 보면 바로 언어장애 진단을 내릴 것만 같은 광수. 한 순간 기적처럼 내려진 용기의 반작용이 그의 머릿속을 쥐어짜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어디가 그렇게 좋으셨어요?"

여전히 천사 같은 미소(광수 시점)와 함께 그렇게 말하는 정숙이를 보고 감동 먹은 광수는, 열심히 자기 마음을 제대로 전하자고 마음 먹었다.


"그게,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착하고 아무튼 사랑합니다."

하지만 잘 안 된 모양이다. 그런 어설픈 고백이었지만, 마음씨 착한 정숙이는 따뜻한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실은 저도, 좋아하고 있었어요. 당신을."

"!"

광수의 눈동자에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희망이 가득 담기기 시작했다. 지금 광수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그건 그대로 예술 작품이 될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렇지만, 괜찮은 건가요? 영희 씨는......"

청전벽력과 같은 말이었다. 사실 광수에게는 영원한 운명을 약속했던 여자가 있었다. 그 이름은 영희. 불행한 일로 지금은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아무튼 광수와 영희가 서로 뜨거운 관계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정숙이가 그걸 모르고 있진 않다는 건 알고 있는 광수였지만, 설마 여기서 그녀의 이름이 나올 줄이야 꿈도 꾸지 못했다.


"저기, 그게, 영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번 사랑한 사람을 그렇게 간단히 잊어버리는 남자라고 생각되기는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숙이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도 없는 광수. 그야말로 딜레마.


"영희가 마지막으로 나한테 말했어."

어떻게든 입을 열기 시작한 광수. 마치 눈물이 섞여들어간 듯한 목소리였다.


"내가 없어도 나만큼은 행복하게 살라구... 좋은 여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가달라구..."

그렇게 말하면서도 광수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변명 같은 소리가 통할 리가 없었다. 여자 입장에서 보면 그냥 가벼운 남자로 보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게 왠일. 정숙이는 참아왔던 것을 터뜨리듯이, 우아하게 웃기 시작한 것이다.


"놀려서 죄송해요. 사실 저도 알고 있었어요."

"알구... 있었어?"

"마지막으로 영희 씨와 이야기했을 때, 영희 씨가 저에게 그랬어요. 그이를 부탁한다고. 그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으니 정숙이 같은 여자가 필요하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녀가 거짓말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도 작은 양이지만 눈물이 고여있었으니까.


"그래서 전 생각했어요. 언제나 곁에 있어드려야겠다고."

"......"

광수는 목이 매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할지, 언제나 고민거리였는데. 이렇게 먼저 와주셔서 기쁘네요."

"그 말이 정말......인가?"

정숙이는 대답 없이 그저 광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둘은 자연스럽게 거리를 좁혔다. 그렇게 하여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그리고 시간은 지나 다음 달. 수많은 가족들의 축복을 받아가며 광수(75)와 정숙이(67)의 재혼은 무사히 성사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앞으로도 행복하게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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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 짧은 단편 | 추석에 찾아온 청춘. 13-09-15
1 엄청 짧은 단편 | 천재 마법 소녀는 굴하지 않는다! 1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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