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비무랑 3
혈교는 혈비무랑의 몸이 안 좋다는 의견에 따라 본거지로 퇴각했다.
요녕산맥에 자리잡은 혈교의 본거지에서는 신교에서 나온 독사혈과 한군영이 연구실에서 혈비무랑을 살피고 있었다.
서늘한 동굴에는 살얼음이 낀 관에 혈비무랑이 누워있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가느다란 혈관과 장기들이 들어있는 주머니 등이 얼기설기 엮여져 있었다.
독사혈과 한군영은 혈비무랑을 지금의 수준보다 몇 단계 더 높일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뇌혈강시와 독혼강신법을 만들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자신 있었다.
우선 재료로 쓰기 위하여 십 세가량의 어린 아이들을 구해오라고 시켰다.
약 오백 명 정도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혈교의 무인들이 어린아이들을 납치해오기 시작했다.
가까운 곳에서는 소문이 금방 나기 때문에 좀 먼 곳에서 구하려고 했다.
또한 한곳에서 너무 많이 납치하는 것도 위험하기 때문에 여러군데서 납치를 하는 바람에 재료를 구하는 일이 수월치 않았다.
그렇게 재료를 구하느라 시간이 필요한 사이에 신교에 있던 소호에게 임무가 떨어졌다.
그동안 암천은 신교의 암영단에서 차출 된 살수들로 일을 했었지만 이번 임무는 소호가 직접 해야 할 상황이었다.
덕분에 혈교가 꾸미는 일을 제대로 신경쓰지 못하였다.
혈교는 신교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몇 달에 걸쳐 드디어 재료가 채워졌다.
열 살 가량의 어린아이들로 오백명이 채워진 것이다.
그 아이들을 한 사람씩 장기를 갈라 필요한 부분만 취하고 나머지는 다 파묻어 버렸다.
납치 된 아이들은 처음에는 엄마를 부르면서 울고불고 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겁에 질려 울음소리도 못 내었다.
일부로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장기를 잘라내는 작업을 벌였기 때문이다.
독사혈과 한군영은 연구만 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연구를 하는 것이었다.
혈비무랑이라는 좋은 재료를 어떻게 하면 불사지체, 만독불침의 지체를 만드는 일과 어떠한 병기로도 살을 찌르지 못하는 만병불침지신(萬原不使之身)의 지체로 만드는 일에 전념하였다.
관에 누워있는 혈비무랑은 편하게 쉬지 못하고 있었다.
자꾸만 이상한 것을 관에다 집어넣어 자신의 몸을 담그기 때문이다.
귀찮고 싫었지만 관에서 일어나면 또 피를 뿌려야 하는 게 싫어서 참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혈비무랑의 백회혈에 또 다른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아이들의 혼백을 혈비무랑에게 집어넣은 것이다.
처음에는 이질감이 들어 싫었다.
그런데 그렇게 싫던 일들이 어느 날부터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피부도 튼튼해진 것 같고 피를 그리워하는 일도 줄어들고 어떻게 하면 잔인하게 죽일까 고민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다.
혈비무랑이 점점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지체에 어떠한 독으로도 죽일 수 없는 만독불침, 그리고 어떤 무기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 만병불침의 지체로 변하면서 생긴 현상들이다.
일일이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자신도 모르게 혈비무랑 자체가 재앙의 수준이 되었다.
재료가 관으로 들어가는 양이 많아질수록 혈비무랑의 편안함은 더해져갔다.
관속에서는 그나마 사람답게 보이던 혈비무랑이 지금은 관속이나 밖에서나 인성이 메말라버린 괴물이 되어갔다.
다른 사람들의 혼백이 들어갔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지금까지 혈비무랑은 반만 불사지체, 만독불침, 만병불침의 상태였다면 이제는 완전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혈교가 왜 그렇게 혈비무랑에 목을 매었는지 이제는 누구나 다 안다.
혈비무랑 혼자서 전 강호를 피로 물들일 수 있게 된 것을.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가끔은 혈비무랑의 기억속에 소호와 절벽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날 때도 있었지만 그나마도 이제는 희미한 기억의 저편으로 날려버렸다.
혈비무랑의 연구도 이제 막바지에 달했다.
그동안 수백 명의 아이들이 목숨을 잃은 댓가로 혈비무랑은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해져서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혈교의 교주인 혈마존이 사람들 앞에 나와서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 혈교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없이 온 중원을 일통하게 되었다. 혈비무랑의 연구가 막바지에 달한 상태이고 우리의 무력 또한 더욱 강해졌다. 그러니 남은 마지막 시간동안 더욱 무공에 정진하여 온 중원을 쓸어버릴 날만 고대하기를 바란다.”
“혈교만세! 혈마존 만세! 와아아아아아아아!!!!”
혈교의 무리들이 요녕산맥이 떠나가라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그렇게 온 무리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지만 진법의 영향으로 밖에서는 일절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늑한 요녕산맥의 자락에 고요하게 자리 잡은 암자만 보일 뿐이다.
***
십만대산 신교.
소호에게 임무가 전달되었다.
황궁으로 잠입해 금의위 수장인 도지휘사를 암살하는 임무였다.
한때 동창의 위세가 강하여 금의위는 동창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신세로 전락한 적이 있었지만 황제가 바뀌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동창의 세가 약해지고 금의위의 위세가 세를 찌른다.
소호에게 황궁으로 들어갈 신분패와 정보가 전달되었다.
삼십대 장한으로 분하여 황궁으로 길을 떠났다.
오랜만에 임무라 감을 잃었을까봐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했다.
이번에 들어갈 황궁에서의 신분은 금의위 위사 석정호라는 인물이었다.
외원에서 근무하는 오급무사였다.
이왕이면 내원에서 근무를 해야 도지휘사를 만날 확률이 높지만 석정호라는 이 신분을 만들기 위해 암천에서도 큰 애를 썼을 게 틀림이 없다.
우선은 황궁으로 들어가는 게 목적이다.
북경에 도착하여 일단 객잔으로 들어갔다.
목욕물과 식사를 주문했다.
목욕을 마치고 식사는 아래층에 내려와서 먹었다.
북경의 황궁 소식을 혹시 들을 수 있을까 하여 금의위 위사들이 앉아있는 곳의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주문한 식사와 술이 소호의 자리로 왔다.
천천히 식사를 하며 옆자리에 앉은 금의위 위사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다음 주에 보직이동이 있을 것 같다고 하던데 자네들은 별 이상이 없는가?”
“보직이동이 있다고 해도 내원에서 근무하는 애들의 얘기지 우리처럼 외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해당사항이 없다네.”
“쓰벌, 우리는 언제 내원에서 근무를 해보나.”
“내원에서 근무를 하고 싶으면 그거 있지 않은가. 그거!”
하며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맞잡는다.
즉 돈을 쓰면 되지 않겠느냐는 뜻인 것 같았다.
그러자 한사람이 말을 뒤이어 받는다.
“돈이 한두 푼 하는 줄 아는가? 우리 월봉이 얼마나 된다고 그 큰돈을 만들 수 있겠나. 그저 그림의 떡이지.”
“그러고 보면 도지휘사가 황제보다 더 좋은 자리야. 안 그런가?”
“쉿! 이 사람이 큰일 날 소리를 함부로 하고 그래.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아니, 내가 뭐 틀린 말을 했나? 황제를 앞세워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인물을 천거하고 뒤로 돈을 받고 마음에 안 드는 인물은 대역죄를 씌워 없애고··· 지금 이 나라에는 황제가 두 분이라네.”
“어허, 거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세. 괜히 엉뚱한 소리를 해서 끌려가지 말고.”
그들은 다른 얘기로 넘어갔다.
아무개가 이번에 혼인을 한다는 둥, 아무개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둥··· 별 영양가 없는 소리들만 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음 주에 보직이동이 있다는 말에 소호의 머리에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돈을 주고 내원으로 옮기면 임무가 쉬워질 것이 분명했다.
소호는 다음 날 황궁의 입구에서 석정호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자 석정호가 퇴근을 했다.
일행들과 함께 객잔으로 들어가 술을 한잔씩 하려나보다.
소호도 따라서 들어갔다.
그들의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술을 마셨다.
의외로 석정호는 말이 별로 없었다.
다른 이들의 말에 맞장구만 치고 간혹 웃기도 하며 조용하게 앉아서 술을 마셨다.
술은 잘 마시는지 다들 취한 상태가 되었는데도 혼자만 멀쩡했다.
덕분에 술에 취한 동료들을 한사람씩 다 집으로 데려다 주고 마지막으로 퇴근을 했다.
성격이 차분하니 성실해보였다.
소호는 며칠을 석정호를 따라다니며 그의 습관과 동료들을 기억했다.
그리고 오늘 석정호를 납치하여 그로 분하고 황궁에 들어갈 생각이다.
저녁에 퇴근하는 석정호를 골목에서 납치하여 미리 준비한 안가로 향했다.
안가는 좀 떨어진 곳의 초라한 집을 얻어 놓았다.
석정호의 손과 발을 의자에 앉혀놓고 줄로 꽁꽁 묶었다.
입에다 헝겊을 잔뜩 쑤셔 넣어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게 해놓고 말을 했다.
“이봐, 당신은 며칠만 여기에 있으면 돼. 내가 당신 대신 근무를 서게 될 테니까. 그리고 당신이 여기서 벗어날 즈음에는 외원이 아닌 내원에서 근무하게 될 거야. 당신을 며칠 감금한 댓가로 충분하겠지? 그러니 너무 겁먹지 말고 얌전히 있어. 며칠만 여기에 있으면 아무런 일도 안 생기고 당신은 내원에서 근무하게 되고 어때? 나쁘지 않은 조건이지? 그러니 며칠만 견뎌.”
소호는 묶어놓은 줄을 다시 한 번 확인을 하고 안가를 떠났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출근을 하여 내원에서 근무하는 인사과 담당자를 만났다.
그에게 금자 오십 냥을 주고 내원으로 빠지게 해달라고 했다.
담당자는 실실 웃으며 내원에서도 그다지 힘들지 않은 곳으로 발령을 내주겠다고 했다.
며칠 후, 석정호로 분한 소호는 내원의 황궁수비대에 근무하게 되었다.
황궁수비대 중에서도 황제가 거하는 보화전의 입구를 지키는 근무였다.
태화전이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는 곳이라면 중화전은 황제가 차도 마시고 옷도 갈아입으며 잠시 쉬는 곳이다.
반면 보화전은 황제의 집무실이라고 보면 된다.
이곳에서 금의위 도지휘사를 자주 만나는 곳으로 국가의 여러 가지 정책을 의논하며 결정하는 중요한 장소이다.
그런 중요한 장소의 입구를 지키는 곳으로 발령을 내준 인사 담당자가 고마울 뿐이다.
돈의 힘이 위력을 발했다.
며칠 동안 근무를 하면서 금의위 도지휘사를 몇 번이나 보았다.
그의 걸음걸이, 옷차림, 그의 행동들을 유심히 살폈다.
임무가 끝나고 태화전을 나갈 때 필요하기 때문에 살핀 것이다.
보화전에서 금의위 도지휘사의 집무실은 그리 멀지 않다.
소호는 야간근무를 할 때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말한 후 도지휘사의 집무실로 향했다.
지붕으로 달려갔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지붕에서 기와를 살살 들춰내어 집무실을 살폈다.
도지휘사와 부관이 함께 앉아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집무실에 있는 것을 보며 임무를 수행할 방법을 떠올렸다.
주간근무를 마치고 퇴근을 하는 척 하며 황궁의 지붕으로 올라가 숨었다.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늦은 밤 도지휘사의 집무실로 갔다.
도지휘사 혼자 앉아서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도지휘사의 무공은 일류정도로 보였다.
지붕에서 기와를 몇 개 더 걷어내고 천장까지 들어갔다.
품에서 회영비도를 꺼냈다.
집무실이 넓어서 일반 암기로는 좀 불안했다.
안전하게 임무를 실행하기 위하여 힘 좋고 멀리까지 날아가는 회영비도를 꺼낸 것이다.
먼저 비도를 하나 소리 없이 날렸다.
거의 도착할 때까지 모르고 있다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이어서 날아간 비도는 어깨를 찔렀다.
너무 놀랐는지 부하들을 부를 정신이 없나보다.
그저 혼이 나간듯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다시 세 번째 네 번째 비도를 날려 목과 심장에 꽂았다.
찍소리 한번 못하고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비도를 회수한 후, 천장에서 나와 지붕의 기와를 원래대로 해놓고 처마 밑으로 해서 집무실로 들어갔다.
밖에서 근무하는 금의위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소호의 은신술을 눈치 채지 못했다.
소호는 재빨리 도지휘사의 옷을 벗겨 자신이 걸쳤다.
얼굴을 도지휘사의 얼굴로 바꾸고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밖에서 근무하던 금의위 위사들이 소호를 쳐다보며 인사를 한다.
“잠깐 태화전에 다녀올 테니까 아무도 내 집무실에 들이지 마라. 다시 돌아올 거야. 아직 못다한 일이 남아서.”
“충! 다녀오십시오.”
소호는 태화전으로 천연덕스럽게 천천히 걸어서 갔다.
뒤로 금의위 위사들이 따라왔다.
태화전으로 들어가서 도지휘사의 옷을 벗어 한쪽에다 숨겨놓고 천장을 타고 다시 지붕으로 올라갔다.
태화전까지만 오면 밖으로 나가기는 훨씬 더 쉽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날아가며 외원으로 빠졌다.
외원에서도 지붕으로 날아가 정문이 있는 곳으로 갔다.
마침 고위관리가 퇴청을 하는지 마차가 한 대 달려온다.
소호는 마차의 안으로 들어가 관리의 아혈을 점하고 같이 숨어 정문을 통과하였다.
정문을 통과한 다음 관리의 몸에 점혈을 하고 마차에서 나와 안가로 달려갔다.
점혈에서 깨어나더라도 관리는 도지휘사의 얼굴만 기억할 것이다.
안가에는 오늘도 의자에 꽁꽁 묶여있는 석정호가 있었다.
소호는 석정호에게 보화전 입구를 지키는 곳이 이제부터 근무지라고 알려준 다음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이름과 자주 드나드는 관료들의 인상착의 등을 알려주었다.
눈치껏 알아서 잘 하라고 한 다음 포승줄을 풀어주었다.
그런 다음 밖으로 나가 경공을 펼쳐 북경을 빠져나갔다.
쉬지 않고 밤길을 달려 북경을 완전히 빠져나간 다음 객잔으로 들어섰다.
객잔에서 목욕을 하고 음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한 후 암천으로 '임무완수'라는 비문의 전서구를 날렸다.
소호는 느긋하게 신강으로 발길을 옮겼다.
신강으로 가는 도중에 소문이 돌았다.
혈교가 신교로 가고 있다고.
무시무시한 혈비무랑이 이번에는 신교를 짓밟아버릴 거라며 많은 사람들이 신교의 최후를 예감했다.
소호는 발걸음이 급했다.
혈비무랑이 몇 달 째 조용했는데 다시 쳐들어온다는 것을 보니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다.
소호는 말을 타기도 하고 경공술로 달리기도 하며 겨우 신강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미 혈교가 먼저 도착을 하여 신교와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끄덕도 안하던 정문이 박살이 나있었고 신교의 안으로 혈교의 무리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 혈비무랑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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