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임무 4
천명이 집으로 들어간 후, 미행자는 집을 한 바퀴 돌아보며 꼼꼼히 살핀 다음 시내로 나갔다.
국정원의 요원 둘이 사내를 미행했다.
사내는 아무래도 북한 공작원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걸음걸이나 몸의 움직임이 날쌔고 민첩하게 생긴 게 많은 훈련을 거친 사내의 몸짓이었다.
사내는 영등포구 대림동의 한 빌라로 들어갔다.
요원 한명이 따라 올라가고 요원 한명은 베란다 쪽을 쳐다보며 서있었다.
대호빌라 301호가 공작원들의 안가인가보다.
혼자 사는 것이 아닌 듯 불은 이미 켜져 있다.
남자들의 목소리가 웅얼웅얼 거리며 들린다.
적어도 세 사람 이상이다.
베란다 쪽을 바라보며 움직임을 살폈다.
빌라는 30평형대 크기였다.
지은 지 오래된 듯 여기저기 칠이 벗겨져있어 낡아보였다.
주차장에서 301호를 쳐다보며 밤새 지켜보았다.
새벽에 두 사람이 301호를 나왔다.
허름한 옷차림이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는 것 같았다.
한사람은 계속 지켜보고 한사람은 두 사람의 뒤를 미행했다.
두 사람은 역시나 인력시장에서 일용직 일을 구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요원은 차안에서 301호를 훔쳐보며 기다렸다.
어제 천명을 미행했던 사람이 정장 차림을 한 채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에 있는 SUV 차량을 타고 길을 나섰다.
두 요원은 한사람이 남아서 또 다른 공작원을 지켜보기로 하고 한사람은 SUV 차량을 쫒기로 하였다.
SUV 차량은 여의도 국회의사당 쪽으로 움직였다.
여의도의 어느 카페 앞에 차를 주차시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요원도 차를 근처에 주차시키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카페는 룸카페여서 안에 누가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점심 무렵이라 자리가 다 찼다며 못 들어가게 했다.
그러면서 다음에 오실 때는 예약을 하고 오라 하였다.
할 수 없이 차에서 북한 공작원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1시간 정도 지나서 북한 공작원이 혼자 나왔다.
분명 누군가를 만났을 텐데 따로따로 움직이는 것을 보니 상대방도 공작원이거나 고정간첩이 분명하다.
북한 공작원은 이제 종로 쪽으로 움직였다.
종로 3가 낙원상가로 움직였다.
낙원상가에서 차를 주차시키고 이번에도 어딘가로 들어가려고 한다.
요원은 빨리 차를 주차시키고 공작원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에는 유명한 한정식 집이 있는 골목이었다.
맞은편에는 허름한 상가들로 이어져 있었고.
허름한 상가들 중, 의류가게로 들어갔다.
요원은 차에서 내려 지나가는 사람처럼 의류가게를 힐끔 쳐다보았다.
가게에는 여자 혼자 앉아 있었고 방금 들어간 공작원은 보이지 않았다.
요원은 다시 차로 가서 기다렸다.
저 의류가게도 감시대상이다.
뒷문으로 나가는 길이 있거나 안으로 들어가서 누군가를 만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느 쪽이든 북한과 관계있는 가게이므로 감시의 대상이었다.
한참 만에 차로 돌아온 공작원은 이제 테헤란로로 움직였다.
대체 뭐하느라고 그런지 여기저기 볼일도 많다.
테헤란로에는 정대식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어쩌면 저 공작원은 보위부 쪽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전화로 할 수 없는 얘기라서 직접 사람을 만나는지도.
역시나 예측한대로 테헤란로 커피숍에서 정대식을 만난다.
정대식을 미행하고 있는 이정수와 김세미를 보았다.
둘은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모르는 척 하며 요원이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정대식과 공작원이 만나는 자리에서 두 칸 정도 떨어진 곳에 앉아 차를 시켰다.
둘은 얘기를 하는데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가 않는데다 음악소리까지 겹쳐서 도저히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포기하고 커피만 마시고 잽싸게 나와 차에서 기다렸다.
저 공작원이 천명이를 미행한 이유가 뭘까?
정대식이 천명이를 고정간첩으로 만들었다고 보고했는데 굳이 미행을 한다는 것은 천명이를 믿지 않는다고 봐야한다.
요원은 사무실에 전화해서 팀장한테 지금까지 일어난 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천명이를 믿지 않는 것 같다는 자신의 생각도 함께 말했다.
팀장은 국장님께 보고할 테니 별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계속 미행하라고 한다.
한편, 천명은 오랜만에 혜미 아버님을 만났다.
혜미 아버님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와서 만나게 되었다.
점심이나 같이 먹자며 약속을 정하였다.
약속장소에서 둘은 반갑게 악수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혜미 아버님은 전에 보다 얼굴색이 좋아 보였다.
“천명아, 어떻게 지냈어? 요즘은 혜미도 안 만난다면서? 그렇게 바쁘게 지낸 거야?”
“예. 혜미한테는 미안하지만 많이 바빴어요. 아버님은 얼굴이 좋아 보이시는데 이제 걱정거리는 없어진 거예요?”
“응. 자네를 만나서 의논한대로 했더니 지금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참 고마워. 이집에 고기가 맛이 좋아서 내 우리 천명이 고기 좀 먹이려고 만나자고 했어.”
“아유, 감사합니다. 아버님. 혜미는 어디 아픈데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까? 마지막 봤을 때 너무 말랐던데.”
“요즘은 살이 조금 붙었어. 정신과 치료도 받고 했더니 트라우마가 많이 사라졌나봐. 다행이지. 그나저나 정대식과는 어떻게 되었어?”
“대식이 삼촌이 이제는 아버님을 괴롭히지 않을 겁니다. 자세한 얘기는 드릴 수 없지만 최대한 좋은 쪽으로 결말을 맺으려 합니다.”
“그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얘기로군. 그 친구 때문에 겪었던 정신적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천명은 정대식에 관한 말이 나오지 않도록 다른 말로 돌렸다.
“아버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이번에는 다른 연구를 하고 있어. 이 연구도 돈이 되는 연구야. 연구비도 넉넉해서 열심히 연구하고 있지. 하하하.”
“아버님은 참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것을 개척하시는 모습이.”
“사람이 돈을 쫒아가려고 하면 돈이 도망가. 그런데 멀리보고 돈을 쫒으면 돈이 어느새 내 지척에 있게 되거든. 그래서 이 연구도 한 5년 이상 해야 할 거야. 그래야 돈이 될지 안 될지 확실히 알 수 있지. 아이구, 고기타네. 타. 얼른 고기 좀 먹어. 많이 먹고 힘을 써야지. 한참 잘 먹을 나이인데.”
천명은 고기를 두 점씩 쌈에 싸서 먹었다.
어르신들은 잘 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이치를 잘 알고 있기에.
***
태수네 집에는 3교대로 집을 지키는 경호원이 있다.
아버님이 큰형님으로 있을 때는 12명이 집을 지켰는데 태수는 6명으로 줄여서 2명씩 3교대로 집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최근 천명이가 국정원에 정보원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위험이 배는 늘었다고 생각해 집 지키는 개로 핏볼테리어 두 마리를 데려왔다.
훈련사에게 개의 훈련을 맡겼다.
할아버지, 태수, 천명이가 주는 먹이 외에는 누가 줘도 먹지를 않게끔 하였다.
설혹 집에서 매일 보는 사람이 주는 먹이도 안 먹게 했다.
집을 지키는 사람들과 집에서 일하시는 분들 빼고 낯선 사람이 오면, 제지하지 않는 한 끝까지 물고 늘어져 죽여 버리는 무서운 개로 훈련을 시켜 달라고 했다.
일주일에 세 번을 와서 한 시간씩 훈련을 시키면 세달 정도 걸린다고 하였다.
시간을 더 늘려서 훈련하면 안 되느냐고 물었더니 개의 집중력이 한 시간을 넘어가면 효과가 없다고 해서 일주일에 세 번씩 한 시간 동안 훈련을 하는 개를 낮에는 우리에 가두고 밤에는 풀어놓았다.
천명이는 의식하고 있지 않지만 태수는 늘 불안했다.
멕시코에서 북한 공작원을 때려 눕혔고 미국에서는 암살자를 잡았기 때문에 잠재적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다.
태수는 집을 지키는 친위대에게 더 신경을 쓰라고 주위를 주었고 천명에게도 항상 미행이나 감시를 조심하라고 했다.
태수는 천명이가 커갈수록 점점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게 속상했다.
천명이 자체는 온순하고 밝은, 건강한 청년으로 자랐지만 이상하게 환경이 자꾸만 위험 속으로 잡아 끄는 것 같다.
태수는 천명이 때문에 자주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다.
왠지 천명이가 위험한 일에 휘말려서 곤욕을 치를 것만 같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천명이가 크면 평범해질 거라 생각한 자신이 어리석었다.
천명이 말대로 천명의 머릿속 칩은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지 않으려나 보다.
한 번의 신체강화가 이루어져 몸속의 노폐물과 독성을 다 뱉어내고 더 강화 된 몸이 되었다는 뜻은 앞으로 위험한 일이 닥쳤을 때 써먹으라고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앞으로 몇 번의 신체강화가 더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을 보니 천명의 삶이 결코 평탄하지 않을 것 같다.
천명이가 처음 태수의 집에 오던 날, 태수가 혼자 중얼거린 말이 있다.
‘네 팔자나 내 팔자나 도긴 개긴 이다. 내 인생도 그리 좋은 건 아니지만 너는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 태어났구나.’라고 한 적이 있다.
태수도 꽤 험난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지만 천명은 어쩌면 태수보다 더 힘든 삶을 살지도 모른다.
그냥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운명이라는 게 있기는 있나보다.
절대로 평범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삶 말이다.
***
정대식은 오늘, 보위부에 리동철 동무를 만나기 전까지 기분이 매우 좋았었다.
매일 또는 매주 천명이가 주식종목을 찍어주는 대로 사고 팔면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300만원으로 시작한 돈이 벌써 3억이 넘어간다.
여기서 한 3억만 더 벌면 가족이 같이 살 집을 구하고 직장을 구할 때까지 쓸 생활비도 될 것 같아 가슴이 벅찼다.
가족을 남한으로 데려오는 일은 국정원에서 해주기로 했기 때문에 따로 돈이 들어갈 일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동안 남한에 와서 6년 동안 한 일들을 다 알려주었고 앞으로도 가족이 올 때까지는 위장간첩의 노릇을 해야 하지만 희망이 점점 보이는 것 같아 요즘은 살 것 같은 날들이었다.
그러나 점심 무렵에 리동철에게서 연락이 왔다.
국가안전보위부 소속의 리동철은 중앙당 39호실 소속으로 김정일 때부터 통치자금, 외화벌이를 전담하는 기관이다.
그리고 멕시코에서 천명에게 두들겨 맞은 북한 공작원의 동료이다.
다 잡은 에미나이를 놓쳤다고 본부에서 엄청나게 깨진 후, 중앙당 39호실 소속에서 국가안전보위부로 좌천되어 남파 된 정대식의 상관이다.
리동철은 미국과 멕시코를 왔다 갔다 하며 외화벌이를 하던 중앙당 39호실 소속의 블랙요원이었다.
멕시코에서 김천명이라는 어린놈한테 개 박살이 나는 바람에 남한으로 남파되었고.
그런데 정대식이 김천명을 고정간첩으로 만들었다고 보고를 해왔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정대식이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해 한동안 어리벙벙했다.
알고 보니 김천명은 고정간첩으로서의 가치가 무궁무진했다.
대그룹의 아들인데다 최고의 학교를 다니고 있는 천재였다.
그런 사람이 뭐가 아쉽고 답답해 고정간첩을 하는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대개는 돈이 필요해서 또는 전과자 신세여서 취직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고정간첩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김천명이 같은 경우는 고정간첩이 될 이유가 없다.
실험삼아 동방화학 연구실에 연구원으로 두 명을 입사시키라고 지령을 내렸더니 못한다고 했다.
만약 입사를 시켰다면 의심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무리를 하면서 고정간첩이 될 이유가 없으니까.
두 번째 지령을 내린 것도 못하겠다며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온다.
세 번째 지령을 내렸더니 그건 또 하겠다고 애를 쓴다.
리동철은 김천명을 직접 보고서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얼굴만 가지고 어떻게 아느냐고 하겠지만 느낌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김천명을 하루 동안 미행한 결과 강호선을 고정간첩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열심히 이행하고 있었다.
덕분에 얼굴만 봐가지고는 김천명이 고정간첩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대체적으로는 알 수가 있었는데 김천명이 만큼은 모르겠다.
정대식은 점심에 리동철 동무를 만나 새로운 지령을 받았다.
김천명에게 돈 30억을 만들어 오라는 명령이었다.
정대식은 기가 막혔다.
아무리 재벌집 아들이라도 30억이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정대식으로서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지금은 30억이지만 다음에는 300억을 만들어 오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들의 수법은 뻔하다.
처음에는 쉬운 것부터 시작해 점점 난위도가 높아진다.
결국 실패할 때까지 밀어붙이는 게 그들의 수법이다.
실패하게 되면 자존감이 낮아져 주눅이 든다.
그러면 일이 더 힘들어진다는 것을 저들은 모른다.
무조건 밀어붙이면 장땡인 줄 안다.
정대식은 천명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미치겠다.
어쨌든 지령이 내려왔으니 말은 전해야 한다.
저녁에 천명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저녁 7시에 자주 만나던 곳에서 만나 새로운 지령을 말했더니 천명이 한동안 말을 잃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한다.
정대식은 미안하고 민망스러워 고개를 숙였다.
“천명아, 미안하다. 저들이 너한테 그런 지령을 내릴지 몰랐다. 이미 지령을 이행하고 있는데 또 지령을 내릴지 정말 생각도 못했어. 아마 네 집이 부자란 것을 알고 저러는 것 같다. 어떡하니?”
“............ 삼촌.”
“어. 그래 말해.”
“언제까지라고 기한이 정해져있어요?”
“아니, 기한은 말하지 않았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안 그러면 닦달을 할 테니까.”
“후. 만들어 봐야죠. 삼촌네 가족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어떡하겠어요.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만들어볼게요. 대신 이 말은 꼭 전해주세요. 또 돈을 요구하면 그때는 고정간첩이고 나발이고 간에 안 하겠다고.”
“알았다. 그렇게 전할게. 그런데 돈을 어떻게 구하려고? 아버지한테 말하면 주실까?”
“아니요. 저희 아버지는 돈에 대해서 철저한 분이시라 제가 그냥 달라고 하면 절대로 주실 분이 아니세요. 우선은 빌려서 주식으로 돈을 불려 만들어줘야죠.”
천명은 정대식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음이 착잡하다.
아빠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나 당장 30억을 만들려면 종자돈이 필요하다.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이유를 물어볼 텐데 뭐라고 해야 하나 머릿속이 번잡스럽다.
우선 국장님께 상의를 해봐야겠다.
< 새로운 임무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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