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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


[좋은 생각] 도를 아십니까?

도를 아십니까?


경고 :
이 이야기는 픽션이며, 이 이야기에 나오는 지명, 이름 등은 실존 인물과 관계없으며, 이야기는 일부 각색되었습니다. 

 하루는 거리를 걷다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을 보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머리가 길어서인지 일반인과 중 고등학생의 구분이 잘 가지 않았지만, 우리 때와 똑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 주변에 친구들이 여럿 있어야 담배를 태우기 시작하는 것은 우리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러고 보면 그때도 그랬다. 내가 어릴 때에도 친구들이 주변에 있을 때랑 없을 때 나의 행동은 180도 달라지곤 했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군중심리라는 것이 발동해서 안 좋은 행동들을 따라 하기도 하고 묘한 경쟁심리가 발동 돼서 누가 더 못난 놈인가 하는 걸 경쟁하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는 부모님이나 사회에 대한 반항과 사회의 통념, 편견에 대한 저항 그리고 자기 자신을 표현 하고자 하는 그 나이 대의 독특한 표현 방법이 아니었나 생각 된다. 그러고 보면 내가 담배를 피게 된 것도 그런 심리였던 것 같다. 아마 그때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시작하기 전의 일이였을 것이다.

 학교가 끝나고 갈 곳이 없는 우리들은 자주 시내 중심에 있는 도서관에 가고는 했다. 그곳에 가면 집이 근처인 친구네 집에서 공짜로 라면을 먹을 수 있었고, 노래방이나 오락실도 많았고 거기다가 용돈을 들고 쇼핑 하러 온 아이들의 코묻은돈을 뺏기에도 좋았다. 나도 자주는 아니지만 여럿이모여 지나가는 우리 나이 또래의 친구들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골목으로 대리고가서 돈을 빼앗아 본 적도 있고, 어느 날은 혼자 다니다가 다른 형들에게 돈을 뺏긴 적도 있었다. 뺏고 빼앗기는 복잡한 먹이사슬과 골치 아픈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시내 중심가 한 가운데 있는 도서관은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우리들은 학교가 끝나면 항상 그곳으로 모였다. 그곳에 모이는 우리들은 갈 곳이 없었다. 사정이 좋아서 학원에 다닐 수 없고, 부모님이 바쁘셔서 집에가도 아무도 없고, 어떤 친구는 집이 멀어서, 어떤 친구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집에 없으셔서, 어떤 친구는 목사인 아버지가 답답해서 그렇게 우리들은 집을 나와 도서관으로 모였다.

“우리 노래방 갈까?”

 이 한마디에 우리는 주머니의 돈을 모아 5천원을 만들었다. 당시에 중·고등학생 회수권이 200원정도 할 때라 5천원이라는 돈을 만들기 위해선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니던가 회수권을 잘리지 않은 것을 사서 칼질로 11개나 12개를 만들어 돈을 아끼거나, 부모님께 준비물을 산다고 거짓말을 해서 다른 주머니를 차는 등 각자 모양은 다르지만 하루나 이틀 이상을 모아야 그 돈을 마련 할 수 있었다. 시내 중심부에선 중고등학생에게는 노래방이 5천원에 한 시간, 거기다가 사람이 없으면 주인이 마음대로 보너스를 주고는 해서 5천원이면 거즌 2시간 3시간을 놀 수 있었다. 특별히 노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네다섯 명이 노래방에서 두 시간 가량을 놀면 우리는 지치고 땀에 젖어 피곤하지만, 그러면서도 개운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놀다보면 얼추 부모님이 오실 시간에 근접해 집에 홀로 남아 멍청히 천장만 바라보고 있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도서관에 가는 것을 아니 노래방에 가는 것을 좋아했고, 돈을 모아서 5천원이 되면 무조건 노래방으로 놀러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시험기간이라 학교에서는 4교시 만에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일찍부터 도서관으로 모였다. 해처리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네 집에서 라면으로 배를 불린 우리들은 일찍부터 시내 중심부를 배회했다. 다른 학교들도 시험기간이라 그런지 주변에는 우리 또래가 많았고 우리는 그들 중 일부 한 명이나 두 명씩 돌아다니는 녀석들을 불러 세웠다. 그날도 우리가 불러 세운 녀석들은 교복을 보고는 도망가기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와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이 싸움을 잘 한다기 보다 친구들과 같이 입고 있던 교복이 우리를 강하게 보이게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학교 학생들은 평판이 나빳던 것 같다.

“알지? 뒤져서 나오면 10원에 한 대고 팬티나 양말까서 나오면 따블이다.”

 교회 목사 아들인 성훈이가 소위 말하는 이빨을 털었다. 그 친구를 중심으로 둘씩 좌 우로 우리가 불러세운 학생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포위하듯이 섰다. 그 학생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우...우리 아까 밥사먹어서 회수권밖에 없는데... 그거 차비라 그거 없으면 나 집에 못가.”

 겁에 질린 학생을 보며 우리는 코웃음을 치며 하나 둘 모여서 주머니가 있는 자리를 손으로 건드렸다. 주머니를 뒤집고 지갑을 꺼내서 탈탈 털고, 신발을 벗어보라고 시키고...

“야 이새끼, 고삐린데?”

 지갑을 뒤지던 친구가 학생증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좋겟네 우린 중삐린데, 우리한테 털려서.”

우리는 낄낄대며 지갑을 돌려줬다. 지갑에 정말 회수권이 한 장 있는지 확인하고 교복 이곳 저곳을 뒤지고, 가방을 탈탈 털어서 필통도 뒤지고... 그러다가 필통에서 천원짜리 몇 뭉치와 회수권이 발견 되었다.

“이런 씨발 고삐리새끼가, 어디서 좃도 야마를 털고 지랄이야 씨발 새끼가! 이게 몇 대짜린지 알아?”

바로 철수의 손바닥이 날아갔다. 뺨과 입술을 스치듯이 지나간 철수의 손바닥은 기어이 고등학생의 입술을 터트렸다. 선혈이 하얀 와이셔츠에 튀고 안경이 날아가 박살이 났다. 조금 심하다고 생각되서 우리들은 회수권 한 장을 쥐어주며 못볼꼴 더보기 전에 꺼지라며 고등학생들을 보내주고 혹시나 경찰들을 대리고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동내를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며 흔적을 지웠다.

“노래방이나 가자.”

 시간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경찰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긴장이나 돈이 생겻다는 것에서 오는 흥분은 이미 예전의 감정이 되버렸다. 우리는 너나 할것 없이 노래방으로를 외첬고, 자주 가는 시간당 5천원이지만 주변에 상권이 제대로 형성 되있지 않아 보너스 시간을 많이 주는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마침 노래방을 들어가는데 다른 중학교 여학생들이 노래를 부르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우리들은 방팅을 제안했고 여학생들은 흔쾌히 허락하여 즉석에서 방팅이 이루어졌다. 평소완 다르게 발라드를 부르지 않나 항상 회수권밖에 없다던 놈이 음료수를 사오지 않나 안하던 짓들을 하며 그날 따라 여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해처리라는 녀석이 Jan Sports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당시에는 This가 널리 보급되지 않아서 아직은 88light를 필 때였다. 해처리는 익숙하게 담배 아랫부분을 처올려 담배를 한 개피 꺼내 물었다.

“후우~~~ 니네들도 펴.”

그 말이 신호였다. 평소 담배를 피던 친구들이 하나 둘 담배를 꺼내 물었고, 목사 아들인 성훈이란 친구랑 나만 담배를 꺼내지 않았다.

“니네들은 담배 안펴?”

같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던 여자애가 나와 성훈이에게 묻자 순간 성훈이는 기지를 발휘해 여자아이가 입에 물던 담배를 빼앗아 입으로 가져갔다.

“여자들은 담배 피는거 아니야. 내가 놀라서 멍때렸잖아.”

성훈이는 익숙하게 담배연기를 입에 넣었다가 뱉었다. 그리고는 간접키스네 뭐네 하면서 여자아이에게 수작을 부렸다. 순간 나에게도 질 수 없다는 호승심이 피어 올랐다.

“야 나도 한대 줘봐.”

 나는 해처리에게 담배를 달라고 했고, 그런 나를 해처리가 의야해 하며 보다가 피식 웃으며 담배를 한까치 물려줬다. 담배를 물고 뻐끔 거린 것은 예전에 할아버지가 살아 게실 때 호기심에 한까치 빼서 뻐끔 거리다가 크게 기침하며 집어던졌던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평소에 집에서 담배를 피우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기 싫었고, 더욱이 그때는 아버지가 하는 모든 행동이 짜증난다고 생각 하던 시기라, 나는 주변 친구들이 담배를 피는데도 그것이 어른들이 하는 못된 행동이다, 아니 아버지가 하는 행동이라 나는 따라하지 않을 거다 라면서 담배를 권해도 피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왠지 오기가 발동했다. 여자애도 피는데 라는 생각과 함께 담배를 입에 문 나는 불을 부치며 페부 깁숙히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콜록 콜록 케헥! 아 씨발!”

기침과 함께 눈물이 낫고 순간 여자애들과 친구들이 날보고 비웃었다.

“아 씨발, 오랜만에 펴서그래 아 씨발!”

나는 괜스리 화가나서 다시 한번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 하지만 내 약한 폐부와 기관지는 그 담배 연기를 맞이하며 고통에 신음했다.

“콜록콜록! 아우 씨발 이런걸 왜피냐?”

“흐하하핫! 병신아 아까워 피지마 크크크.”

“아 제 귀엽다 완전 내스타일이야.”

눈물을 찔끔 거리면서도 귀엽다는 말에 솔깃하며 궁시렁 거리던 나는 조용히 해처리를 불러 담배를 피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담배를 접했다. 친구들과 여자들 앞에서의 오기부리기와 주변에서 모두가 담배를 피는것이 나도 피워야 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위압감에...

그때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친구들에게 한 개 두 개씩 담배를 얻어 피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중 3겨울방학 때 기숙사 학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내가 담배 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담배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없도록 기숙사 학원에 보내신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담배를 정말 아무런 이유도 아닌 이유로 피기 시작 햇다. 주변에서 피기 때문에 나와 같이다니는 친구들 즉 또래집단 내부에서 담배를 피웠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나는 담배뿐만이 아니라 많은 행동을 다른 친구들이 하기 때문에 라며 행했던 것 같다. 내가 눈앞에서 보고 있는 담배를 피고 있는 학생들도 그럴 것이다. 친구들 끼리 몰려 다니다가,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자 어쩌다 같이다니며 담배를 피우거나 어른들이 하는 담배를 하는 나는 어른이다 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나 아니면 이것도 못피우냐는 소리없는 말, 눈빛에 대한 쓸대없는 자격지심이나 오기 때문에 담배를 피기 시작했을 것이다. 저 친구들도 몰려다니면서 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오락실에 가고 피씨방에 가고 노래방에 가고 학원을 땡땡이 치고 준비물 값을 삥땅치고 그 돈으로 담배를 사고 모자란 돈을 다른 약한 이들에게서 빼앗을 것이다. 그 때는 재미있고 묘하게 긴장되면서 흥분된다. 해본적은 없지만 마약이 주는 긴장감처럼 달콤하다. 저 친구들은 아니 저때의 우리들은 단지 친구들과 같이 있다는 것으로 죄책감이 사라지고 도덕심이 뒤로 물러났다. 담배를 피고 있지만 말리거나 혼내는 어른들도 없고, 모두가 그냥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간다. 어른이 된 나 또한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가고 있고, 그때 내가 담배를 필 때 어른들도 얼굴을 찌푸리며 갈 길을 재촉했다.

 담배라는 것은 사회의 법과 어른들이 금하는 ‘금단의 열매’라 칭할 수 있는 물건이다. 이는 일탈, 탈선을 의미하기도 하고 법을 무시하며 어른들에게 반항한다는 의미와 상징성을 동시에 갖는 물건이다. 또래집단은 이렇듯 일탈과 반항 탈선을 주제로 뭉치기도 하며, 그 집단에 들어가고자 일탈과 반항 탈선을 하기도 한다. 그 집단에 이미 속해 있다면, 이러한 ‘금단의 열매’를 자기만 따먹지 않았다는 상대적 박탈감과 불 일치감을 느끼고 집단을 나오기도 하지만 외로워지기 보다는 금단의 열매를 같이 공유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담배를 피웠던 것 또한 그랬던 것 같다.

 저 친구들도 우리들이 그랬듯이 몰려다니며 돈을 빼앗고, 자전거를 훔치고, 부모님 속을 썩일까? 그리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누군가를 괴롭히며 즐거워하고 낄낄대며 수다를 떨까? 학교에서 저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저들도 소위 말하는 학교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기도 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네고 있을까? 나도 학교를 다니며 학교폭력의 가해자 입장 이였던 적이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영원한 가해자도 피해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이나 해봤을까? 내가 가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자가 된 것은 고등학교로 진학 한 이후였다.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면서 우리집은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전에 있던 집이 A시 남쪽에 있었다면 이번에 이사 가게 되는 집은 A시의 북쪽 끝에 있었다. 논밭밖에 없던 지역에 갑작스럽게 아파트들이 들어서게 되면서 고등학교가 신설되고 그래서인지 별로 희망하는 사람이 없었는지 1지망에 썻던 집에서 가장 가까운 J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2월달에 예비소집이라며 학교에 모인 우리들은 선생님을 기다리며 서로간의 눈치 싸움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유행하던 오리털 파카를 입고 비니를 푹 눌러 쓴 상태로 눈빛을 부라리며 여럿을 예의주시 하며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다들 어색해하고 아는 얼굴이라곤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중학교 동창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 친구 말로는 자기 말고 이 학교에 온 동창은 두명 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 몇 일 뒤부터 교복을 입고 학교에 등교하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서로가 서로를 탐색 하느라 눈싸움 눈치싸움이 벌어졌고 몇몇은 공공연히 백그라운드가 마치 ‘전설에 따르면...’ 같은 식으로 소리 없이 번졌다. 지금 학생들이라면 상상도 못하겠지만 당시에는 트위터나 핸드폰 같은 소셜네트워크가 발달 하지 않았던 때였다. 지금 생각해도 소문들이 어떻게 누군가의 입과 입을 통해서 번진건지 의문이 들지만 당시에는 건드려도 되는 녀석과 건드리면 안 되는 녀석의 소문이 스리 슬쩍 퍼졌다. 일단 거기에서 1차로 조용히 분류 작업이 끝났다. 다른 학교 짱의 친척, 싸움 잘하는 형을 가진 놈, 중학교 때 사람을 찌른 놈, 집이 엄청난 부자, 공부 잘하는 놈, 판·검사 자식 등 여러 가지 분류가 매겨지고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우리들은 그들에게 관심을 끊었다.
 학교에 다닌 지 며칠이 지나자 무리 짖기가 이루어졌다. 최소 10명에서 최대 20명 정도로 무리지은 학생들의 특징은 바로 같은 중학교를 나왔다는 것 이었다. 같은 중학교에서 놀던 녀석들 끼리 무리를 이루고 나자 나같이 동창이 얼마 없거나 다른 도시에서 왔거나 중 3말에 전학을 와서 친구가 없는 녀석들은 낙동강의 오리 알 신세처럼 붕 하고 그 위치가 떴다. 그런 변화는 머지않아 실생활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시비를 걸다가도 ‘좃 만한 새끼야 뒤지기 싫으면 찌그러져라.’ 라고 하면 꼬리를 만 강아지처럼 도망가기 일수 인 녀석이 중학교 시절 동창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며 나를 가리켰다. 나는 쫄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석의 앞을 지나가며 ‘한번만 더 가리키면 손까락 꺽어버린다.’ 라고 하며 지나갔고 녀석은 친구들과 함께 뒤에서 수근거렸다. 그리고 다음날 이었다. 평소 나에게 시비를 걸던 갑수의 중학교시절 동창 패거리들이 사건을 일으킨 것은.

 학교가 아침부터 떠들썩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갑수와 같이 다니던 놈들 중 철환이라고 하는 친구가 구석에서 무언가를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 짱개 새끼들이 말이야...”
 철환이는 중국집 배달원3명과 S중학교 동창생 17인이 시비가 붙어 중국집 배달원 3명을 피떡을 만들어 놨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마치 전장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온 장수처럼 떠들고 있었다. 중학교 때도 그랬지만 학교 밖에서 누군가와 싸우고 돌아오면 우리들은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들이 무용담을 늘어놓듯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해주기 일수였다. 하지만, 그들의 무용담이 귀에 거슬렸다. 내가 다니던 O중학교에서는 우리 쪽수가 많았을 때 보다는 쪽수가 적은데도 이겼을 때만 조금 과장을 보태 1:17정도로 이겼다고 할 수 있을 때에만 아이들에게 자랑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다수가 소수를 핍박, 즉 다굴을 처서 이겨 놓고는 그걸 자랑이라고 말하다니 정말 치사하고 약한놈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새끼들을 피떡을 만들어 놓고 코알라 그놈이 불쌍해 보여서 휴지 꺼내서 애들한테 ‘피딱아’ 이러면서 피딱아 주고 있었는데 왠 아저씨가 알라 그새끼를 잡는거야. 근데 그 아저씨가 그 짱깨 새끼들 아버지래. 존나 웃기지 않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옆에서 같이 웃고 있던 갑수가 나를 발견하고는 나를 가리키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나는 평소처럼 반응을 할 수 없었다.

“1학년 4반 정갑수, 유철환, 기라성, 경염철 1학년 교무실로 1학년 4반 정갑수...”

 주위를 둘러싼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던 철환이는 어깨를 으쓱 하면서 교실을 나갔고 갑수 녀석은 계속 나에게 손으로 목을 긋는 모양을 하며 교실을 나갔다. 나는 불안했지만 오른손 중지를 녀석에게 보여주며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시비를 받아넘겼다.

 S중학교 출신 중 패싸움에 가담한 17명의 학생들은 약 2,100만원가량의 합의금을 물고 1명 퇴학 2명 정학 나머지는 학주에게 빠따를 맞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 학교에선 같은 중학교 출신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이 유행이 되기 시작했다. S중학교 C중학교 V중학교 등등 이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중학교 출신들끼리 완벽하게 뭉치자 이제 남은 것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인 우리들이였다.

 갑수 녀석과는 그 사건 이후 2일 만에 다시 만났다. 1교시 수업이 끝나고 쉬는시간, 수업이 끝나고 사물함으로 가려는 나에게 갑수녀석이 시비를 걸었다.
“어이 좃만이? 손가락 꺽는다매?”
발을 멈칫 한 나는 갑수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같이 사건에 연류되 학주에게 빠따를 맞은 친구들과 S중학교 동창 친구들이 주변에 있었다.
“꺼져라 병신아,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너정도는 잡는다.”
쫄면 지는거라고 생각했고 나는 솔직히 많이 쫄아있는 상태로도 분위기를 잡으며 으르렁 거렸다.
“어이쿠 시발, 좃나 무섭네 크크크.”
시비를 걸면서도 친구들 뒤로 숨어버리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가던길을 갔다. 중학교 때 같으면 옥상으로 올라가서 다이다이 뜨자 화장실에서 한판 하자 하면서 길길이 날뛰었을 테지만 바로 어제 들은 따끈한 소식이 어느 학원에서 J고등학교 출신 학원생과 어떤 학원생이 시비가 붙어 2대 1로 싸워서 깨지자 전화로 친구들을 불러 5대 1로 밟아줬다는 소식 이었다. 괜히 피곤해 지기 전에 중학교 때 친구들 이라도 불러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사물함에 책을 넣느라 상체를 숙였을 때.
“씨발놈아 니가 그렇게 잘났냐?”
 고개를 돌리려고 하는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줄이 3개가 간 3줄 슬리퍼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여 머리로 발을 받아버렸다. 충격에 머리가 아프지만 사람의 머리는 인체의 가장 단단한 부위중 하나이고 평소 돌머리 소리를 듯는 내 머리에 발을 부디쳤으니 발이 성하진 못할거다 라는 생각이 찰나에 스처갔다. 웃으면서 고개를 들려고 하는데 바로 옆에서 주먹이 날아왔다.
“억!”
머리와 턱을 가격 당해서 정신이 없었다.
“니가 나랑 싸우면 이긴다면서?”
“개새꺄 니가 O중 나왔다며? 그래서?”
“좃만한 새끼 우리가 만만하냐?”
정신없이 주먹과 발길질이 쏟아졌다. 나는 선체로 그리고 바닥에 넘어진 체로 주먹과 발 세레를 받기 시작했다.
“아이 씨발!”
반항을 하기위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잠시 피했던 녀석들은 이윽고 아사다리(발걸어 넘어트리기)를 하고는 나를 밟기 시작했다. 이미 입술이 터지고 온몸이 얼얼했다. 나는 번데기처럼 몸을 웅크리고 머리를 손으로 감싸 않으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정신없이 얻어 맞으며 눈을 뜨고 웅크린 팔뚝 사이로 교실을 둘러봤다. 몇 명은 재미있다는 듯이 보고 있고, 몇 명은 안됬다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때리는걸 도와주려는 자들은 있었지만 말리는걸 도와주려거나 쉽사리 말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다들 보고만 있었다. 일부 친한 척 하던 친구들도 말리려고 하지 않았다. 싸움이면 말렸겠지만 이것은 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구타다. 나를 보는 이들의 눈빛에는 내가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는 걱정이 비쳤다.
 정신없이 몇 분을 맞았다. 때리는 놈들도 서서히 지친것 같았다. 그때서야 춘모라는 대추빛 얼굴에 덩치가 크고 좋은 녀석이 나섰다.
“이제 그만들 하지?”
“끼어들지마라. 우리들 일이다.”
춘모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가 안경을 벗으며 나직히 경고했다.
“어쩔라고 씨발새끼야? 한판 할래?”
춘모가 안경을 벗어 던지자 춘모의 출신 중학교인 C중학교 친구들이 주변으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S중 아이들은 나를 때리던걸 멈췄다. C중 친구들이 춘모에게 물었다.
“왜 낀건데?”
“아 몰라. 그냥 저새끼들 짜증나잖아.”
나중에 안 거지만 춘모는 내 초등학교 동창 이였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이왕이면 처음부터 아는 척을 해서 패거리에 꼈으면 이 꼴은 안 당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학교 내에서는 나는 가해자의 입장이 아닌 피해자 입장이 되었다. 후에 나는 만만한놈으로 먹잇감으로 약한 놈으로 위치가 떨어졌다. 나중에 중학교 동창인 오군과 이야기를 나눠 봤지만 오군은 이미 나보다 먼저 다굴을 맞았고 몇일걸러 하루 꼴로 계속 시비가 붙어 싸움에 휘말리고 있어서 오히려 나보다 사정이 나빠 보였다. 성질도 가뜩이나 모난 녀석이라 그런지 맞으면서도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시비를 받아주다 보니 빽도 없이 성질 더러운 놈이라고 찍혀서 주변에 노리는 녀석들도 많았다. 그리고 나머지 동창 둘을 찾았더니 한명은 덩치는 큰데 순둥이라 있는듯 없는듯 지내고 있었고, 한놈은 중학교 시절부터 괴롭힘을 당하던 녀석이라 고등학교에 와서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나중에 초등학교 앨범을 뒤저서 몇 명 아는 녀석들을 찾아가 봤지만 그들의 반응은 이미 약자로 낙인찍힌 나와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았다. 그중 5학년 때 같은 반에 있었던 남생이라는 친구는 자기도 S중학교 출신이라며 미안하긴 하지만 자기도 어쩔 수 없다고 다음번에도 다굴 치려면 말려주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평상시에 교실에서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다행히 누구누구가 나서 줘서 잦은 구타나 괴롭힘은 없었지만, 나도 그때 부터는 눈에 힘을 풀고 둥글게 둥글게 원만하게 대처해 나가며 소위 말하는 어리버리를 쳤다. 대답도 으응 하며 건성 건성 뭘 물어도 건성 건성 싸움을 걸어도 넘어가고 사람좋은 웃음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속에서 열불이 터지지만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매우 힘든 학교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어른들이나 선생님들은 이런일이 있으면 학교에 바로 바로 이야기 하라고 했지만, 그때는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선생님이나 어른을 개입 시킨다면 그때 잠시는 넘어가지만 나는 지는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였다. 괜히 이런 일을 학교나 부모님께 이르면 어른들의 힘은 한때고 왕따나 은따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아이들은 떨어지지 않는 감기처럼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의 선택은 지금의 내가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다시 했을 것이다. 어른들은 믿지 못하고 숫자에는 장사가 없었다. 심지어 맞은편에 있는 초등학교에 어머니가 다니시는데도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며 어머니를 딱 한번 그것도 팔이 불어저서 병원에 가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찾아간적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들은 맞고오면 맞고 왔다고, 때리고 오면 때리고 왔다고 혼내시기만 하셨지 내 편을 들어 준 적이 없었다. 선생님들은 잘못한 학생들 에게 빠따를 때리지만 그 학생들은 빠따를 맞고와서 아이들은 괴롭혔다. 소문에 듣기로는 옆반에 있던 중학교 때부터 괴롭힘을 당하던 동창녀석은 고등학교에 와서 애들이 보는 앞에서 남에 의해 자위행위를 했다고 한다. 어차피 알았다고 해도 도와 줄 수도 없었고, 아니 도와주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아주 처참하고 인간적이지 못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들으며 나는 그놈하곤 아는척도 하지 말아야지, 그놈보다는 내가 몇 단계 위니까 등등 속으로 위안을 삼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왜 그때는 괴롭힘을 당하고, 그런 사건 사고들을 알면서도 어른들 즉,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1학년 초에 집단 폭행으로 주동자중 몇 명이 퇴학이나 전학수속을 밟았다. 하지만 소년원에 간 것도 아니고 퇴학이나 전학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언제고 다시 만났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아이들이 학교에서조차 멀어진다면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다. 왠만한 죄를 짖지 않고는 다시금 기어들어오니 보복이 무서워서 어른들에게 이야기하기도 그렇고, 이야기해서 퇴학조치를 당하면 학교를 나가기가 무서웠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현재의(당시의) 청소년 처벌 시스템은 우리들의 완전한 안전을 보장 할 수 없다는 것을.

 실제로 2학기 정도에 학교에 다니는 어떤 익명의 친구가 P도 교육청에 위에서 이야기 한 모모군의 폭행, 추행 및 괴롭힘 당하는 친구들과 폭행당한 아이들의 사건 사례 그리고 실명과 실제 학교를 거론하며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학교 폭력에 대해 처벌을 부르짖은 적이 있었다. 몇 명의 가해자 및 피해자들이 교무실로 불려 갔다. 가해자들은 단체로 학생주임선생님에게 채벌을 당했고 피해자들은 불려가서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나 또한 그 글에 이름이 있어 교무실로 불려갔다.
“앉아라.”
마치 죄를 짖고 들어온것 마냥 선생님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자리를 권했다. 게시판에 뭐라고 써있는지 모르는 나로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불려가며 업드려 뻗처 자세로 교무실에 들어가는 나에게 궁시렁 거리는 몇몇을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 돈을 가져오라고 강요당한 적이 있니? ... 물건을 뺏겻다던가, 아니면 사라고 강요 당한적이 있니?”
선생님의 질문은 아마 다른 친구들에게도 똑같앗을 것이다. 나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만 반복했다. 틀린말은 아니지 않나? 나는 애들에게 다굴을 맞은적이 있고 무시를 당한적이 있지만 물체나 갑어치 있는 것을 가지고 다닌적도 없고 강탈 당학적도 없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모든 대답에 예 예 예 예를 한다면 부모님을 모셔오라는 둥 고소하지 말라는 둥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것이 뻔하고 뿐만 아니라 밖에서 벌서고 있던 애들이 어찌 저찌 주워듣고 다시 괴롭힐게 뻔했다.
 대답이 미온해서 그런가? 아니면 만족스러워서 그런가? 암만해도 어머니 직업이 교사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선생님은 질문을 그만하고 일장 설교를 시작했다.

“너도 알지만,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은 학교에서 해결을 해야지 그런곳에 글을 올리면 피곤해요. 응? 선생님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지? 우리 선생님들이 다 여기 교무실에서 니들 기다리고 있는데 니들이 다른곳에서 하소연을 하면 어떻게 하니?”

사실, 선생님들과 나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어머니가 선생님인 것도 있고, 장난도 많이치고 말대답도 많이 하지만 익살을 넘어서는, 선을 넘어가는 행동은 하지 않았고 싹싹했다. 하지만 이 S모 선생님은 사이가 나쁘고 좋고를 떠나서 친한척 하기도 싫었고 아주 싫었다. 말로는 학생들을 위해주는척 열심히 하는척 하면서, 자기는 박O스를 좋아한다면서 부모님들이랑 면담하실 때 다른것 들고 오지 말고 박O스만 들고 오라고 하면서 은근 슬쩍 뇌물을 강요했다. 아주 역겨웠다. 특히 우리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 이지만 학부형들이 촌지를 놓고 가면 계좌이체를 해주던지 아니면 가는 아이 손에 다시 들려서 보냈고, 먹을것 아니면 스승의 날에 들어오는 화장품 정도나 들고 집에 들어오셨다. 정말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은 그런 부정 교사를 보고 또 가식적인 설교를 듣는데 마치 몸에 벌래가 기어가는 듯한 거부 반응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게시판 같은데다가 학교 이름을 쓰면 어떻게 하니? 학교 입장이 뭐가 되겠냐 이말이야 응?”

 마치 내가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그 게시판에 학교 이름을 써서 학교가 피해 봤다고 나를 추긍 하는듯이 설교가 이어졌다. 나는 죄지은 것도 없이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말을 다 듣고 나왔다.
 이 사건이 있은 뒤부터 아이들은 선생님들을 더욱 믿지 않았다. 심지어 P도 교육청 게시판은 일시 문을 닫았다는 소리가 있었다. 사건에 연루된 녀석들 중 한명이 퇴학을 당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였다. 우리들은 더욱 선생님을 믿지 못하고 마음의 문을 닫았고 몇일 뒤 선생님에게 불려간 학생들은 교실을 돌아다니며 “너냐? 씨발놈아? 응?” “왜 또 교육청에 글올리게?” 등의 추궁을 하며 학생들을 들쑤셨다. 졸업 할 때 까지 게시판에 글을 올린 사람은 나오지 않았고 그 글을 올린 사람은 미스테리로 남았다. 보복이 무서워서 글을 올린 사람은 아무에게도 자기가 그 글을 올렸다고 말하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그렇게 글을 올렸는 데도 아무것도 변하는게 없고 오히려 애들 화만 돗구게 되자 그녀석도 글쓰기를 포기 했나보다. 뒤로는 누구도 선생님에게 불려가지 않았다.

 이제와 그때를 되돌아 보면 그렇다.

 고등학교에 올라선 초년생들은 주로 자신이 진학한 학교의 동창들을 위주로 뭉친다. 새로운 환경을 접하게 되는 청소년들은 같은 유대감이나 소속감을 가진 집단끼리 뭉치게 되는데 그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학교이고 다음이 지역 그리고 취미 등이다. 하지만 고등학교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지역은 대부분 같을 테고 취미 등은 서로 이야기하고 겪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으므로 가장 먼저 영향력을 행사 하는 것이 이전 소속 학교이다.

 그리고 또래집단은 집단으로 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위에 소개 했던 패싸움이다. 물론 또래집단의 집단행동이 저런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행동들도 많다. 하지만 가장 떠들썩하고 가장 눈에 띄는 행동 그리고 또래집단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행동중 하나가 집단으로 공격적인 성향을 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단에서 소외된 아이들은 여러 가지 행동을 한다. 하나는 새로운 집단을 만들기도 하고, 집단에 들어가려 노력하기도 하며, 아니면 자의든 타의든 집단에서 배제 된다.

 예를 들면 위에서 말한 어떤 동창의 경우 아이들의 앞에서 타인에 의한 첫 자위를 경험하게 된다. 모두가 피하려고 하고 혹시나 친한 척 하면 나 또한 무시 당할까봐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불쌍하고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만약 우리나라가 총기소유가 가능한 나라였다면? 이러한 사건이 터진다면 미국에서처럼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하고도 남을만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학교폭력에 대해 법적 제도적 시스템이 미약하다. 일단 학교에서는 가장 수위가 낮게는 면담에서 가장 수위가 높은 것은 퇴학이다. 하지만 이는 방지 수단으로 있는 것이지 이미 그 수단이 사용된 이후에는 더 이상 학생들을 컨트롤 할 능력을 잃게 된다.
 또한 한국의 형법이 많은 부분 청소년에게 관대하게 되어 있고 대부분이 보호자들이 손해배상(소위 땡값)으로 합의를 많이 하고 형사적인 처벌은 잘 안하게 된다. 제도도 미온적이고 반응도 미온적이다. 그리고 아이들 일이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과 오죽 못났으면 하는 반응 같은 경우 더욱 더 피해자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또한 이때는 사춘기를 겪는 학생들이 많다. 무조건 적인 부모에 대한 반항과 부모와의 신뢰문제를 가지고 있거나 이전에 교육자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던가 하는 아이들은 어른들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뭔가 배출구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이 어떤 아이들에게는 또래집단과 어울려 다니는 일로, 어떤 아이들에게는 탈선으로, 어떤 아이들에게는 남을 괴롭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또래집단은 가치관이나 행동 습관 등을 공유 하려고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어 타인의 주제가 자신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와중에 이러한 또래 집단에서 소외를 당하거나 자신만의 배출구를 갖지 못하는 아이들의 경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으며 일부는 고독의 세계로 들어가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청소년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 해주는 것 또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법적 재도가 되든 개인적인 관심이든 아니면 책임에 따른 의무적인 인도이든... 나또한 겪었지만 그때의 그리고 지금의 인도 방식은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심리학이나 심리치료 상담 등에 대한 인식이 극심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 정도의 정신질환자들만 가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어 가벼운 상담조차 꺼리는 실정이고, 실제로도 가벼운 정신적 스트레스 등에 의해 관련 병원을 찾을 경우 각종 회사 등의 인사 고과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입사를 거부하기도 한다. 해서 아무도 상담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상담을 받게 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피해자는 물론이고 가해자 그리고 그러한 특징을 갖지 않는 일반 학생들 조차 이러한 상담은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들어난 것은 숨기고 숨겨저 있던 것은 발견하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덥고 사고가 없는 것만을 중요시 한다. 이러한 것이 오히려 청소년(뿐만 아니라 많은 일반인들)의 환부를 더욱 곪게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환경에서 청소년기를 겪은 우리나라 국민은 정신력이 매우 강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정신력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요소를 가진 그런 정신력이 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올바르게 변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아주 특이한 유아기를 보내는 아이들이 교육과 지도 상담 여러 가지 조치등을 통해서 인성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방영 했던 것은 예능으로서 시청률을 이끌기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교육과 지도에 대한 지침서를 제공하고 상담이나 정신치료 등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으로 자식도 적게 낳고 자식을 끔찍이 위하는 등으로 최근 소위 말하는 버릇없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경종을 울리기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나올 정도로 우리 사회는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정신과 진료나 상담은 우리에게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다. 나는 학교 폭력을 줄이기 위해서도 어린 아이 때부터 정신과 진료와 상담은 신체검사처럼 필수적이고 의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유일한 해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하나의 방법론 이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다들 그랬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은 싸우면서 친해진다는게 맞는 말 같기도 하다. 아마도 학기 초에 그렇게 싸운 것은 아직 친한 친구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고등학생 때 보다 더 어린 시절 초등학교 유치원 시절에도 우리들은 싸웠다. 놀이터에서 그네를 내놓으라고 싸우기도 했고, 술래잡기 하는데 안껴준다고 사우기도 했고 별의 별 이유를 가지고도 싸움을 했다. 다만 어릴 때와 다른 것은 싸우고 나면 친해진다기 보단 싸우고 나서 서열이 갈라진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서열이나 계급이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어른들의 사회에 물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학생들에게 계급을 매겼다. 1등급 2등급... 학생들은 자체적으로 계급을 매겼다. 일진, 이진... 학교는 다원화 되고 민주적인 사회를 가르치지만 학교 자체는 그러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사회의 획일적인 면과 민주라는 이름 뒤에 책임과 의무만을 강조했다.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었다. 권한을 쟁취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눈에 띄는 행위를 용서하지 않았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는 명목 하에 학생들은 공부하는 기계로 전략한다. 복종하는 기계로 전략한다. 아니 전략 해야만 한다. 이런 분위기들이 당시의 우리를 숨막히게 했던것 같다. 정말 도움을 주기 위해 뿌리치는 손마저 우리는 거부했다. 어른들은 믿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우리의 색을 갖고 싶다. 교복을 거부하고 머리를 기르고 싶다. 학교를 거부하고 밖에서 놀고 싶다. 그것이 우리의 당당한 권리이다. 권리가 따르지 않는 의무 따윈 거부하겠다. 투쟁이다! 싸움이다! 반항이다... 이런 생각들 혹은 본능적인 반응이 특히나 고등학교 시절에 강했다. 사람들은 이때를 사춘기, 혹자는 반항을 시작하는 시기라고 부른다. 물론 이러한 학생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이 많다. 그것은 아마도 나이를 먹어가며 겪은 시대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우리 부모님 세대, 요즘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가 되가고 있는 그분들은 학교에 가고 싶어도 등록금을 내지 못해 집으로 쫒겨 나기 일수였고, 일찍부터 일을 해 다음날 먹을 양식을 마련하기 바빳고, 동생들을 돌보기 바빳으며, 소를 몰고, 아버지 대신 운전을 하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걱정일 시절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어떻게 학교에 가지 않을까 고민하고, 학교에서 다른 애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고, 누구는 누군가에게 맞지 않기위해 걱정하고, 누구는 선생님에게 담배피는 것을 걸리지 않게 걱정하고, 학교에서 때리고/맞고 다니는 것을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기를 걱정하는 그런 시대가 왔다. 부유하고 가난을 모르고 걱정이 없는 녀석들이라는 어른들의 말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 풍요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에게 가난 혹은 걱정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의 정서적 결핍과 걱정의 결핍이 이러한 상태를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고등학교는 매우 역동적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는 대부분의 실력이 파악되고, 1년 동안 친해지면서 여간해서는 싸우거나 시비가 붙지 않았다. 아마도 어떤 ‘키워드’를 말하지 않는 이상은 대부분이 화를 낼 일도 시비가 붙을 일도 없었다. 그중 한 친구가 있었다. 없을 때는 빨갱이라 부르고 있을 때는 이름을 불러주던 이 친구의 ‘키워드’는 자존심 이였다. 별명이 빨갱이 일 정도로 다혈질에 흥분이 잦고 얼굴이 빨개질 일이 많았던 이 친구는 남들보다 자존심이 남들보다 쌨다.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같은 반이였던 이 친구는 자존심 상하는게 왜 그렇게 많던지 주변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친구였다. 오죽 했으면 내가 이 친구의 싸움을 말리다가 어리버리 하지만 착한애라는 소리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내심은 정말 피곤했지만 이 키크고 얼굴이 빨리 빨개지는 친구는 나중에는 내말을 정말 잘들었다. 내가 싸움을 말리다가 중간에서 몇 번이나 얻어터지니 이 친구도 미안해 진 것 같다. 나중에 졸업 할 때는 그동안 다혈질인 자기 옆에서 싸움 말려주느라 고마웠다고 나중에 안경 쓸일 있으면 공짜로 해줄 테니 찾아오라고 했을 정도다. 키가 크고 위협적 이지만 이 친구는 덩치에 비하면 싸움 실력은 별로였다. 그리고 자존심이라는 ‘키워드’를 건드리면 평소에 자기보다 쎄건 안쎄건 일단 싸움부터 붙고 보는 친구였다.
 그리고 보니 또다른 ‘키워드’를 가진 다른 친구도 있었다. 안창이라는 친구였는데 잘생긴 마스크에 평소에도 웃으면서 친구들을 대해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친구였다. 하지만 이 친구에게도 남들에게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부모님이 이혼하게 되면서 가세가 기울어서 인지 이 친구는 부모 욕을 하게 되면 완전히 돌아버리게 된다. 안창이의 ‘키워드’는 가정, 혹은 가족에 관련된 말이었다. 내 주변에 있던 친구들 중에 정말 영화에서처럼 완전히 빡돌아서 선생님에게 무언갈 집어던지고 화를내며 기물을 파손한 녀석은 이녀석 밖에 없었다. 중학교 때는 B시에서 A시에 잇는 N중학교로 전학을 온 뒤 공부로 전교에서 5등을 했다는 녀석이였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와서 학업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성적은 바닥을 기었다. 거기다가 실업계로 전학가야 한다면서 고등학교 2학년 때 부터는 실업계에서 무시 당하지 않게 담배를 펴야 겠다며 담배를 배우기 시작하더니 점점 삐뚫어 졌다. 결국 이 친구는 실업계로도 전학가서 기술을 배우지도 않고, 성적은 바닥을 긴체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아이들이 폭력적·공격적으로 변하는 ‘키워드’는 성격에서 올수도 있고 주변 환경(가족문제, 주거문제, 학업성적 등등)에서 올 수 있다. 즉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으로 나뉠 수 있는데 선천적인 것이라는 것도 분석하기에 따라서 후천적이 될 수 있다. 날 때부터 사람의 유전적 형질이 결정되어 성질이나 형질이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변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인간의 진화와 성장 돌연변이 들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인간의 성격조차도 사실은 후천적인 요인으로 설명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후천적인 요인은 그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이고 그 와중에 일어나는 어떠한 특이한 사건이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평범한 사건 또한 개인의 후천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 사실 선천적으로 결정 되는 것은 거의 Gender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나마도 사실 외적으로는 수술을 통해 바꾸기도 하지 않는가? 여하튼 결국 아이들이 공격적으로 변하는 ‘키워드’는 후천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러한 후천적인 ‘키워드’를 발생하지 않도록 하거나 혹은  ‘키워드’를 후천적으로 환경의 변화를 주어 제거 할 수 있었다면 아마 안창이란 친구는 철저하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이 천편일률 적이지 않고 사건이 어떻게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가이드라인은 제시 할 수 있지만 이것이 모두 지켜질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키워드’를 후천적으로 환경을 변화시켜 제거 하는 것은 어떨까? 그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다혈질이던 한 친구가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 까지 같은 반을 하면서 여러 번 싸움을 뜯어 말리고, 설득하고, 때로는 그 와중에 자신에게 혹은 상대에게 맞기도 한 친구가 미안해서 ‘친구를 때리는 피해를 주면서 까지 내가 남들에게 싸움을 거는 나쁜놈이구나 다혈질을 고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자 결국에는 그 성격을 고쳤던 점은 이것이 다른 경우라도 얼마든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면 사람의 공격적인 성향 혹은 삐뚫어 지려는 코드를 고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격이 올바르게 형성 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반항하는 이유도 학교에서도 공부 집에서도 공부라고 이야기 하지 실제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주거나 삐뚤어진 인격을 잡아주려고 하지 않는다는 인식 때문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2학년 때 부터는 우리들의 관심사는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싸움이나 다툼 이런것이 아니였다. 바로 노는 것, 학교를 벗어나 다른 곳에서 아니면 학교 내에서 노는 것들이 하나의 관심사였고, 다른 하나는 이성, 즉 여자에 대한 것이였다. 특히 이 여자에 대한 것들이 이때의 우리들의 가장 큰 주제였지 않나 싶다.
 누가 누구랑 뽀뽀를 했네, 내가 22일이 지낫으니 20원씩 달라는 둥 100일 지났으니 100원씩 달라, 니가 글씨를 잘쓰니 내 편지를 대신 써달라는 둥 매일 이런 이야기들이 학교에서 오갔고 수업은 뒷전이고 편지를 쓴 다던가 여자친구 준다고 학을 접는 친구들 교환일기를 쓰는 친구도 있었고 별걸 다 만드는 친구들이 있었다. 몰려다니긴 남자들끼리 몰려다녔지만 우리들의 핵심주제는 ‘여자’였다. 주로 어디까지 가봤다라는 자랑과 어떻게 했다라는 음담패설들이 주를 이루었고, 실시간 야동과 다운로드 야동으로 파벌이 갈라져 주소를 주거나 메신저로 동영상을 보내주는 친구 위주로 모이는 등 우리는 여자라는 주제를 공유하고 그 주제 하에 뭉쳤다.
 여기서 말한 주제 즉 이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많다. 말들 뿐만이 아니라 이에 대해서 책들도 많았고 정식으로 학회에 발표되는 이론들도 많았고, 심지어 ‘카더라’하는 소문들도 많았다. 이 시기가 우리에게는 성 정체성 확립 및 올바른 성관념을 갖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이때의 또래집단의 관심거리를 올바로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이러한 성에대한 호기심과 삐뚤어진 관념이 자칫 범죄 행위로 발전 할 수도 있다.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이라는 것 또한 이러한 삐뚫어진 호기심과 성 관념이 또래집단을 만나 벌어진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가끔씩 어떤 녀석들은 여자친구가 임신을 했다며 여러반을 돌아다니며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가곤 무단으로 결석을 하기도 했고 어떤 여자애가 애를 땟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아마도 이때 보호장비 없는 문란한 성 경험을 하기 시작한 아이들이라면 낙태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는 문제뿐만 아니라 성병에 쉽게 노출 될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 한다. 물론 지금도 당국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교육을 하긴 하지만, 차라리 성교육을 위해 구성애씨 같은 강사를 초빙할 돈으로 콘돔을 하나라도 더 사서 강제로라도 가지고 있게 하는 것이 더 낳지 않을까 생각한다.

담배피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런저런 과거 생각에 빠져들고 나니 나는 문득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후 까지만 해도 내가 그때 일대일로 싸웠으면 이겼을 텐데, 그때 고등학교 올라올 때 남녀 공학이라고 담배를 끊을게 아니라 그냥 피울걸 그랬네 하면서 철없는 생각을 하곤 했다. 철이 없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아마 지금 저 아이들도 철이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철이 들었다는게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아니 알려준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땐 그랬다. 사회에 나와 내가 입고 내가 먹고 내가 자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돈이 들고 돈을 벌기위해선 일해야 하고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이 거부감을 느꼈던 성경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고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 남자라면 군대를 가야한다는 그 의무를 겪고, 그리고 그때 고등학교 때 조금 더 잘 할 걸 하면서 후회의 눈물을 흘리다가 다시금 후회라는 것을 할 시간이 없구나 라는 것을 느꼈을 때 그 때! 담배가 더 이상 달지 않고 쓰고 역겨운데도 나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켜고 있었다. 중독된, 습관이라는 무서운 중독에 나는 또다시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 담배피는 어린 친구들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 저 친구들도 나중에 후회 할지도 모르지. 사회가 저들을 잡아줄 수 있지 않을까? 나도 저때 저랬나? 저들도 누굴 괴롭힐까? 아니면...

 나 또한 가해자가 되기도 했고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이왕이면 가해자 쪽 이었으면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무리 개인주의 사회가 도래하였다 하더라도 인간(人間)인 이상 인간과 교류를 한다. 한자로 인간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말함이다. 즉 사람은 사람과 어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는 기준은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반드시 인간에게 옳고 지켜야 할 도(道)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도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나서서 올바른 도의 길로 인도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속으로 담배를 피고 있던 친구들에게 다가가 질문을 하는 것을 상상한다.

“도를 아십니까?”
라고...


댓글 2

  • 001. Lv.32 rupin

    14.12.18 01:45

    자식에게 읽게 하고픈 글입니다.

  • 002. Lv.60 정주(丁柱)

    14.12.18 12:37

    전 애인도 없는데, 자식이 있으시다고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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